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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은진] 열여섯 시우의 징검다리 골라먹기

2009.11.11 16:56:37
a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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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산_썸네일.jpg


학교를 그만 두고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젠 입에서 단내가 난다. 나 이러다 은둔형생활자 되는 거 아냐? 살짝 근심이 밀려오는 찰라, 은수한테 전화가 왔다.


 



 


학교를 그만 두고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젠 입에서 단내가 난다. 나 이러다 은둔형생활자 되는 거 아냐? 살짝 근심이 밀려오는 찰라, 은수한테 전화가 왔다.
“야, 너 영화 좋아하지? 내가 다니는 민들레에서 영화 강의 있는데 한번 들어보지?”
강의? 별로 땡기진 않지만 뭐 달리 할 일도 없으니.


 




갔다. 영화 강의래서 강동원 이야기라도 나올 줄 알고 갔더니, 이건 뭐 상업영화가 뭐냐는 둥, 독립영화가 뭐냐는 둥, 영화와 관련된 직업에 이러저러한 게 있다는 얘기만 줄창이다. 아, 이게 진로 강좌였구나. 그나저나 영화에는 감독, 배우, 프로듀서, 스태프 정도만 있는 줄 알았더니, 홍보, 캐스팅, 시나리오, 카메라, 조명, 녹음… 정말 다양한 직업이 있구나. 10년 넘게 영화를 제작하셨다는 강사님은 이러저러한 교육기관이 있긴 하지만 지금의 한국 영화판, 직업으로 등용되는 공식적인 통로가 없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신다.



아, 사람들은 뭔가 멋진 일들을 하면서 밥을 벌어먹고 사는구나. 나도 이제 슬슬 진로에 대해서 고민해 볼 때가 온 것 같긴 하다. 언제까지 편의점 알바로 연명할 순 없지 않은가. 저지르기만 했지 대안은 없는 내 삶. 간만에 강의라는 걸 들었더니 공부도 좀 해 보고 싶은 생각이 싹트긴 하네. 아주 조금.



평소에는 맛볼 수 없는 럭셔리한 수제쿠키를 간식으로 씹으면서 민들레 입구에 있는 브로슈어들을 들춰봤다. ‘학교 밖 청소년 징검다리 학습과정’? 이게 뭘까?


 




‘지속적으로 학습하기는 싫지만 나의 흥미와 관심에 따라 뭔가를 배우고 싶을 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 어떤 경로를 통해 내가 원하는 길로 가야할 지 막막할 때
이제 놀만큼 놀았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의논하고 싶을 때
나에게 맞는 학습 방법이나 학교가 있을지 찾고 싶을 때
도란이 이야기 나눌 친구가 필요할 때
단지 쉬고 싶을 때’
징검다리 학습과정과 함께 하란다.
이거 완전 나한테 하는 얘기 아냐?



오늘은 사랑의학교에 훈장님이 하시는 강의를 들으러 왔다.


 




오잉? 갓 쓰고 도포 입은 훈장님, 포스 장난 아니다. 조선시대도 아니고... 이거, 오늘 졸다 집에 가는 거 아냐? 그런데 이 훈장님 정말 쩐다. ‘쩔어’라는 표현을 섞어 가며 백운학, 이성계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유명한 복서들의 어퍼컷과 오토바이 이야기까지... 정말 쩌는 훈장님이 아닐 수 없다.
강의가 끝난 뒤엔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잡지책을 오려 붙여 만들어 보는 생애설계 프로그램이 이어졌다. 아, 이런 거 생각해 본 적 별로 없는데... 내 과거라... 오토바이? 그래 오토바이와 함께 한 약간 어두운 과거. 지금? 지금은 잘 모르겠고, 미래엔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 이런 걸 여러 사람 앞에서 발표하자니 낯 뜨겁지만 여러 명이 함께 껄껄대며 이런 얘기 주고받으니 재밌기도 하네.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나와 이런 걸 한다는 것, 뭐 나쁘진 않다.



수요일 오후 한 시 반.
나는 몽담몽담에 나와 작은 테이블에 앉아 빵을 먹고 있다. 먹던 빵을 치우고 몽담중 시작. 첫 번째는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 배우기. 이춘 샘이 종이를 한 장씩 나눠주신다. 빈칸 채워 넣기다. “________ 아저씨가 _______ 국수를 ________ 사람들에게 _______ 주고 있다.” 이런 문장 말이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주신다. 예전에 정말 말이 없는 어떤 아이가 이걸 했는데, 그 페이지의 수식어를 모두 “한 글자”짜리로 완성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는. “한” 아저씨가 “물” 국수를 “그” 사람들에게 “퍼” 주고 있다. 뭐, 이런 식. 정말 기발한 아이야!
신중한(?) 나는 두 번째 문장에서 좀체 나가지 못하는 중. 10여 분의 시간이 흐른 후, 이춘 샘이 나에게 말씀하신다.
“쓰기 힘들지? 네가 워낙 신중해서 그래. 내가 너 신중한 거 잘 알잖니. 다 안 해도 돼.”


 




목요일 오후 4시, 오늘은 트럼본을 불러 간다.
트럼본이라니... 내 생애에 트럼본을 불어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빈 교육장엔 새로운 샘 ‘한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 유도를 했던 분이란다. 아, 풍채와 카리스마가 다 이유가 있었다!
먼저 선생님이 메트로놈이란 걸 꺼내 트롬본에 다신다. 오잉? 호기심 20% 충전!
우리에게 악기를 꺼내라하시곤 죽 지켜보시더니 악기를 꺼내는 법과 넣는 법을 알려 주신다. 덤으로 슬라이스 닦는 방법까지. 호기심 20% 더 충전!
이제 악기 쥐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되겠니? 이게 떨어지겠지?” 몸소 시범을 보여 주시며 일일이 알려 주신다. 신뢰 20% 충전!


 




이제 드디어 우리가 불어 볼 차례. 당연히 소리, 이상하다. 선생님은 악기를 하나하나 살펴 보시더니 고무줄과 휴지를 이용해 트롬본에 응급처치를! 아, 믿을 만한 선생님인 것 같아...
게다가 한판과 트롬본 오래 불기 내기에서 이긴 1인의 친구 덕에 오늘은 짱깨를 얻어먹게 생겼다! 선생이란 사람한테 자장면을 얻어먹다니! 이건, 내 생애 처음 있는 일이야!



어쩌다 보니 내가 일주일에 몇 번씩 어딘가로 가서 뭔가를 배우고 있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냥 심심하니 한 번씩 외출하는 것도 나쁘지 않고, 가끔 재밌기도 하고, 가끔은 뭔가 배우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해지기도 한다. 내 나이 열여섯. 학교를 때려 치워도 친구들을 만나고 뭔가를 배우고 뭔가 잠시 고민해 보기도 할 수 있다는 게 쬐금은 다행이다. 이런 나에게도 스무살이 오겠지? 그땐 뭘 하고 있을까? 아참, 오늘은 틔움에 가서 장사하는 날이다. 이런 고민은 접어두고 와플이나 많이 팔고 와야겠다. 오늘은.


 




* 이 글은 서울시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징검다리 학습의 현장 스케치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가상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