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소식
작성자관리자
날짜2009-05-18 21:00:00
조회수4868
걸어서 바다까지 후기 - ①
하자작업장학교 성현목
'걸어서' 라는 말은 나에게 늘 일어나는 일처럼 당연하게 다가오는 말이었다.
아주 먼 거리가 아니라면, 또 날씨가 아주 춥거나 아주 덥지 않다면 나는 보통 버스나 지하철대신 걷기를 택했기 때문이다.
걸바를 간다고 처음 들었을 때도, 첫날 걷기를 시작하기 전까지도 '걸어서' 바다까지의 '걸어서'는 나에게 그 정도였던 것 같다.
그래서 익숙했던 걷기 여행을 앞두고 나는 이것저것 가방에 쑤셔 넣었다.
나에게 걱정이 있었다면 '8일 동안 헤어드라이기 없이 어떻게 사나'와 '제발 비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뿐이었다.
첫날 하자에서 출발해서 처음 걸었던 길은 한강을 따라 난 길이었다.
가파른 오르막도 내리막도 없는 긴 평지가 쭉 뻗어 있어서 '이깟것쯤이야' 그 길을 걷는 초반에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애들하고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하며 걸었고, 걷다가 폭소를 터트리며 옆으로 튕겨나가기도 했고, 끝말잇기를 하거나 서로 문제를 내면서 들뜬 마음으로 걸었다.
하지만 그 들뜬 마음도 차츰 가라앉았다. 점심 먹을 때 쯤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우비를 꺼내 입었다. 가방 때문에 우비 단추가 잠기지 않았다.
비가 촥촥 내리는 게 아니라 조금씩 내렸기 때문에 빗방울이 튄 옷은 점점 눅눅해졌다.
우비 모자가 귀를 덮어서 귀에는 바스락 거리는 거슬리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에도 비오는 걸 굉장히 싫어했는데 이렇게 많은 길을 앞에 두고 비가 내리니 기분이 착잡했다.
점점 말수가 적어졌다. 도대체 이 한강은 언제쯤 안보이려나 싶고, 표지판은 아까부터 같은 방향만 가리키는 것 같고, 계속해서 보이는 다리들과 쭉 뻗은 길도 조금씩 지루해졌다.
발도 조금씩 아파오기 시작했다. 발이 아프다고 느꼈을 때 사실 조금 놀랐다.
'첫날부터 아프다니! 예전에는 아무리 걸어도 힘든 거 아픈 거 별로 없었는데' 싶으면서 내 몸이 조금 변한 것을 느꼈다.
발은 점점 더 아파왔다. 지치고 피곤함도 밀려왔다. 하남 꽃피는 학교 까지 가는 게 1년처럼 느껴졌다.
길거리의 표지판에 하남이라고는 쓰여 있는데 도대체 하남은 언제 나오는 건지, 꽃피는 학교가 있기는 한 건지….
걸바를 오기 전에 상상리뷰를 쓰면서 생각했던 '혼자만의 시간도 갖고' '주변 환경들도 보고' 이런 생각은 하나도 나지 않았다.
오로지 빨리 꽃피는 학교만 보이길 바라면서 남은 날들을 어떻게 보내야하나 걱정할 뿐이었다.
꽃피는 학교가 눈앞에 보였을 때 엄청 기뻤지만 그걸 표현할 기력도 없었다.
발걸음은 이제 절뚝거리기까지 했다. 밥 먹을 때도 '빨리 먹고 쉬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일이 있어서 쉼이 있는 게 아니라, 쉼이 있어서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에 뼈저리게 공감했다.
이틀째 날 꿈터와 민들레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만 숫기가 없던 터라 내심 걱정하면서 기대도 했는데 걸음 속도의 차이로 아침에 만나고, 쉴 때 간간히 얼굴만 보고 지나치고, 저녁에 만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오늘은 다른 사람들이랑 이야기 해봐야지' 라고 다짐을 해도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예전부터 내 첫인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무서웠다', '다가가기 어려웠다'라는 말이 대부분이기에 내가 어렵게 느껴질 것 같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그 모습은 내가 변하고 싶어 하는 모습이지만 가장 변하기 어려웠던 모습이다.
그리고 사람들과 깊이 알기 전에는 내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 내 성격이 그렇다고 합리화를 시켜도
이런 모습들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에게 항상 걸림돌이 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걸바에서도 이런 내 모습이 영향을 주었다니! 슬프다. 흑.
그렇게 매일 매일을 걷는 것으로 시작을 해서 걷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니 걷는 것에도 많은 종류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많은 종류에서 다가오는 의미도, 느낌도 각각 달랐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함께 걸을 때는 나만의 걸음 보다 함께 걷고 있는 사람들의 걸음에 내 발걸음을 맞추게 되었다.
사람들이 무리지어 빨리 갈 때는 내 걸음이 나도 모르게 빨라지고, 그 걸음이 늦춰질 때면 내 걸음도 느려진다.
함께 걷는 사람들과 걸으면서 일어나는 일들에 집중을 하고 그 분위기에 맞춰 걷다보면 어느새 내 걸음도 그 분위기를 따르게 되는 것 같았다.
사람들과 함께 걸을 때는 나 혼자 걸을 때, 또는 둘이 걸을 때와 느낌이 달랐다.
그 시간은 한 가지에 몰두하거나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 보다는 함께 수다를 떨고,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말할 수 있는 시끄럽고 활발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분위기에 묻혀서 내 발의 느낌은 조금 무뎌졌다.
유독 나는 둘이서 걸을 때 느낌이 참 좋았다.
걸바라는 것 안에서만, 하자라는 공간 안에서만 사람을 만난다는 느낌이 조금 더 그 사람과 사적으로 만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함께 걸어가며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을 마치 처음 만난 것 같은 새로운 기분이 들기도 했고,
그 사람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는 시간들이 되었다.
어떤 한 사람을 내가 '알았다'라고 말 할 사이는 아직 되지 못하지만 더욱 많이 알아보고 싶고 이야기 해보고 싶다는 생각들이 많이 들었다.
처음 혼자서 걸어보았을 때 나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앞, 뒤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걸었다.
지금까지 사람들과 함께 걷는 시간들이 단순히 더 재미있게 다가와서.
혼자 걷는 것 보다 났다고 생각한 나머지 혼자 걷는 시간을 뒤로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혼자 걷는 시간만이 줄 수 있는 신선한 것들을 느끼고 그 시간들의 매력에 푹 빠졌다.
혼자 걸을 때는 정말 앞, 뒤 생각 하나도 하지 않고 내 걸음걸이만을 찾으면서 걸었다.
내 걸음의 속도는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걸어가다 보니 그동안 휙휙 지나쳤던 것들도 눈에 조금씩 들어왔다.
5월이라 그런지 꽃들이 많이 폈다. 냉이꽃, 꽃다지, 민들레, 제비꽃, 꽃마리, 별꽃.......
모두 어렸을 때 학교에서 아주 익숙하게 보고 배웠던 꽃들인데 요새 들어서 다 잊고 지냈던 것들이다.
그 꽃들을 다시 보자니 너무 반가워서 한동안 행복에 젖어들어 노래까지 부르면서 걸었다.
정말 어떤 색도 자연의 색은 따라잡을 수 없어! 라고 생각하며.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면 왠지 모를 무서운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내 앞에, 뒤에 나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왠지 모르게 힘이 되곤 했었다.
8-9일 동안 걸으면서 나의 감정기복은 엄청 심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였다.
아주 크게크게 감정이 변했던 것은 아니지만 자잘한 감정들이 속에서 마구 뒤엉켜있었다.
힘들어 죽겠는데 앞에 오르막길이 쫙 펼쳐져있으면 그 길을 탓하고, 시간을 탓하고......
그러다가 또 평지나 내리막길을 보면 오르막길에서 느꼈던 감정들은 휙 하고 날아가 버렸다.
이상하게도 길찾기들과 꿈터 민들레와 8-9일을 함께 먹고 자며 보낸 것이 처음이었는데도 큰 갈등이나 문제들이 제기되지 않았다.
나도 내 안에 감정기복은 심했었지만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내 감정이 크게 좌우된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아니면 내가 무뎌져있었거나 내 감정도 벅차서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또 '이런 자잘한 일' 이라고 생각해서 참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피한다.
'내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스스로 피하고 끝이 난다.
어쩌면 평소에도 내가 이렇게 지나치는 일들이 많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직면해보지 않고 참는다거나 그냥 넘어간다거나 하는 일들이 나에게는 아주 많다.
그것을 나는 어떤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회피하거나 모른 척하는 것보다는 세련되게? 직면해 보는 것도 다른 무언가를 볼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번 걸바를 통해 혼자 혹은 함께 걸으면서 늘 내 옆에 있지만 느끼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을 다시 새롭게 보게 된 것 같다.
사람들도, 식물들도, 거리의 간판도, 건물도, 나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면 항상 곁에 있어 익숙했던, 사소하다고 느꼈던 것들을 나는 다시 발견한 셈이다.
솔직히 지금 이 순간'내가 걸바에서 찾은 것은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무언가는 뚜렷하지 않다.
하지만 8-9일 동안 내가 걸었던 길들, 그 길에서 만나 것들, 일어난 일들, 내가 보고 느낀 것들에 대해서 많은 아쉬움이나 후회 같은 건 남지 않았다.
지금 당장에는 뚜렷하지 못하는 것들이 언젠가 나에게 분명하게 나타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걸어서 '바다'까지.
나에게 이 '바다'는 걷기의 큰 목적이나 목표가 아닌 단지 마지막 날 도착지였다.
도착지는 바다였지만 내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그 무엇은 바다로 가는 길 위에 있었다.
나의 걸어서 바다까지는 바다를 가기위해 걷는 것도 아니었고 8박 9일, 그게 끝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바다까지 걸었던 그 길들에서 마주친 것들이 우리가 마주한 바다에서 뚝 끊이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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